올 해를 시작하며 새해가 밝았다고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보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다 보면, 아무래도 뿌듯함 보다는 후회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마치지 못한 일을 더 오래 기억한다는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는 게 있습니다.

  러시아 여성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은 어느 날 식당에서 수많은 손님들로부터 주문을 받는 웨이터들이 메뉴를 헷갈리지 않고 서비스하는 게 신기해서, 자기 음식을 날라다 준 웨이터에게 조금 전 옆 테이블에 갖다 놓은 메뉴가 뭐였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 웨이터는 본인도 당황스러울 만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자이가르닉은 이 일을 계기로 몇 번에 실험을 거쳐 그 원인을 발견해 냈습니다. 우리는 완결되지 않은 문제는 기억회로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되뇌지만, 반대로 과업이 끝나고 더 이상 소용이 없어진 문제는 기억회로에서 깨끗이 지운다는 원리였습니다. 이 원리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자이가르닉의 실험은 이렇게 진행됐습니다. 자이가르닉은 참가자 164명을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누어 간단한 과제를 주었습니다. A그룹은 과제를 수행하는 도중에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았고, 반면 B그룹은 과제를 도중에 중단시키거나 다른 과제로 넘어가도록 방해를 했습니다. 실험이 끝난 뒤 B그룹은 A그룹보다 과제를 2배 이상 잘 기억했다고 합니다. 또한 B그룹이 기억해 낸 과제 중에 68%는 중간에 그만둔 과제였고, 끝까지 완수한 과제를 기억해 낸 비율은 32%에 그쳤다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수많은 정보를 처리해야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들 중에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정보들은 과감히 무의식의 세계로 던져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이가르닉 효과 역시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완결 지은 과업이 계속 기억회로에 남아 있으면 뇌가 과부하에 걸리기 때문에 기억회로에서 지워 버리고, 풀리지 않는 문제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는 겁니다.
  자이가르닉 효과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됩니다. 즉, 끔찍한 재난을 겪었거나, 심각한 사건·사고를 당했을 때, 이러한 기억이 악몽 속에서 오래 동안 반복·지속되는 이유는 심리적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완전히 ‘종결’이 되지 않은 기억이 기억의 회로 속에서 계속 해서 반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첫 사랑에 대한 기억이 오래 남는 것도 자이가르닉 효과에 따르면 완결 짓지 못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또, 사랑하던 관계가 종결되고 이별을 맞을 때도 그 관계를 종결지은 사람과 그 관계를 종결 짓지 못한 사람 중 어떤 사람이 그 사랑에 대해 더 오래 기억을 하게 될지 설명해 주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기억을 종결시키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라고 위로를 해 줌으로써 스스로 그 과업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용서하고, 상대를 용서하고, 그리고 이제 그 일을 떠나보낼 수 있도록 깨우쳐 주는 것이 심리치료의 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올 한 해, 좋았던 기억도 많고, 나빴던 기억도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잊지 못하고 후회로 남아 있는 기억들이 있다면 이제 우리 마음속에서 그 과업을 끝내고, 스스로 마무리를 지어보는 건 어떨까요? 다가올 한 해는 더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와 올 한 해 아쉬웠던 일들을 내년에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으로 지난 기억들을 떠나보내는 게 내년에 만날 나를 더 멋지게 만드는 길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