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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면 생각나는 사람 - 故 장영희 서강대 교수
작성자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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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면 생각나는 사람 -  故 장영희 서강대 교수
 
 
 

 
5월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소아마비로 두 다리와 오른 쪽 팔이 마비되어 평생을 목발로 운신하던 영문학자로 주옥같은 영시들을 신문에 연재해 많은 팬을 가졌지만 8년 전에 걸린 척추암 등으로 결국 운명을 달리한 장애인들의 ‘맑은 소리’가 되길 희망했던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바로 그녀이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혔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고(故) 장영희 교수가 '엄마'에게 남긴 편지로 타계하기 직전 병상에서 노트북으로 사흘 동안 쓴 마지막 글이다. 막내 여동생 순복씨는 "통증과 피로감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 속에 한 줄 쓰다 쉬고, 한참 있다 또 몇 자 보태고 하는 식으로 쓰느라 그렇게 됐다"고 전했다. 장 교수의 어머니 이길자씨는 둘째 딸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업어서 등·하교시켰으며, 진눈깨비 내리는 날이면 딸을 학교에 못 데려다 주게 될까 봐 꼭두 새벽에 일어나 연탄재를 부숴서 집 앞 골목길에 뿌려놓았다고 한다.
 
암환자와 장애인의 희망이던 장 교수는 2009년 5월9일 낮 12시50분 4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생애 마지막 8년 동안 장 교수는 세 번 암 진단을 받았다. 2001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완치됐으나 암이 척추로 전이됐고 다시 간까지 번졌다. 장 교수는 지난 2년간 24차례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2010년부터 보급될 중학교 영어 교과서와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집필을 계속했고 병상에서 교정까지도 봤다. 수필집 에필로그에 장 교수는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며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고 썼다.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끝으로 병원에서 퇴원한 장 교수는 어머니, 여동생 순복씨 가족과 함께 살아온 서울 마포구 연남동 집에서 열흘을 보냈다. 지난 3일 이후에는 반(半) 의식불명 상태였다. 어린이날인 5일, 허리가 아파 누워 있던 어머니가 몸을 추스르고 장 교수 다리를 주물렀다. 순복씨는 "의식이 없던 언니가 엄마 손길을 느끼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고 했다.
 
장 교수는 2009년 5월 7일 재입원했다. 8일 조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9일 오빠 병우(62)씨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타계하기 직전 장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엄마"였다고 오빠 병우씨는 전했다.
 
 
그녀의 삶,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우리 가슴에 꺼지지 않을 '희망의 불씨' 피우고…
 
"끝이 안 보이는 항암 치료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지만, 독자에게 한 내 말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희망을 연구하고 실험하리라. 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내년 봄 연구년이 끝날 무렵에 멋진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면,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2008년 12월 장영희 교수가 신문에 보내온 '2008 겨울, 희망편지―비켜라, 암!, 내가 간다'의 마지막 구절이다. 장 교수는 그 신문 칼럼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영미시(英美詩) 산책' '아침논단' 등을 통해 고난에 굴복하지 않는 도전 정신과 긍정적 삶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장 교수는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5년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해왔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해서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고,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으로 올해의 문장상을 받았다.
 
 

2004년 9월 척추로 암이 옮아오자 장교수는 "신(神)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올가을 나는 계획이 참 많았다." 장 교수는 당시 3년간 신문에 연재하던 칼럼 '장영희의 문학의 숲' 중단을 알리는 마지막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이어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 이런 다짐대로, 그는 오뚝이처럼 병마를 이기고 이듬해 강단에 다시 서는 투지를 보였다. 그러나 2008년 암이 간까지 전이되면서 학교를 휴직하고 최근까지 치료를 받아왔다.
 
장 교수는 2006년 두 번째 암 투병을 이겨낸 뒤에는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 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장 교수는 투병 기간 중에도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생일' '축복' 등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장 교수는 또 장애인의 정당한 권익을 찾기 위해서 실천에 나선 행동가이기도 했다. 2001년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시절, 7층짜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꼭대기 층에 살던 그는 3주 동안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장 교수는 이 아파트를 관리하던 보스턴 굴지의 부동산 회사를 상대로 싸워 사과와 함께 보상을 받아내기도 했다.
유력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는 장 교수의 스토리를 머리기사로 소개했고, NBC TV와 지역 방송들도 앞다퉈 소개해 5400만 미국 장애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장 교수는 당시 인터뷰에서 "장애인 학생들에게 '스스로 일어서라'고 가르쳐온 내가 적당히 타협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유작(遺作)이 된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의 서문에서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더 크고, 확률에 위배되는 것은 '기적'이기 때문"이라며 삶에 대한 강한 집념을 적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며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그녀는 지금 5월의 따스한 묘역에서 외로이 장애우들에게 역시 ‘하루하루의 기적’에 대해 장애우들에게 영혼의 목소리를 전해주고 있다.
 
 
 
<이글은 조선일보 블로그 http://blog.chosun.com/sjsjpink/3959211 에서 발췌하고 정리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전동성(자유기고가. 전 경향신문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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