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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위대했다
작성자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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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위대했다
 
 
 
#1. 장애자녀의 삶에 녹아든 아버지
2011년 9월, 경상남도 창원시 무학소주 본사에 있는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기업 '무학위드'에 두 부자가 찾아와 입사시켜줄 것을 간청했다. 그리고 군청공무원 출신인 진정호(57)씨와 지적장애 1급인 아들 영수(32)는 동기생으로 입사했다. 아버지 진씨는 “내가 아들을 저렇게 만들었다”며 지난 30여년 동안 아들의 수발을 위해 살았다고 밝혔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자동차 부품 공장 직원, 폐기물 수집상, 관광버스 기사 등을 거치다가 이제 장애인 기업의 직원으로 아들의 동반자가 된 것이었다.

지난 1981년 여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진정호(당시 27세)씨는 두 살배기 아들 영수를 안고 집 안 마루에 서 있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순간 품에 안고 있던 아들을 떨어뜨렸다. 마룻바닥에 뒤통수를 찧은 아들은 울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 경기를 일으켰다. 이후 아들은 또래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 때 말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들은 지적 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의사들은 "뇌세포 발육 장애"라고 했다.
지난 1988년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또래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자 군 소재지에서 근무하던 진씨는 특수학교가 있는 경남 마산시로 전근을 가겠다며 도지사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후 진씨는 아들을 위해 전국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모두들 '자신이 없다'며 치료를 포기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서울의 대학병원을 찾았으나 "치료는 불가능하다. 자연과 함께 살면 좀 나아질 것"이란 말을 들었다. 17년 동안 해 온 공무원 생활을 접었다. 퇴직금으로 강원도와 충청도를 다니며 가축을 기르고, 나무를 심으며 1년을 지냈지만 아들은 호전되지 않았다. 이번엔 "사회생활을 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진씨는 장애인들을 고용하는 회사를 찾아 아들을 입사시켰다. 하지만 아들은 남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길어야 4개월, 짧으면 몇 주 만에 회사에서 쫓겨나곤 했다. 진씨는 "2000년부터 옮겨 다닌 회사만 10군데가 넘는다"고 했다.
이런 아들이 장애인 사회적 기업인 무학위드에 입사하자 이번엔 1년여간 해오던 관광버스 운전을 그만두고 함께 '무학위드'에 입사해 출근했다. 오전 9시인 출근시간보다 훨씬 이른 오전 5시부터 아들은 옷을 갈아입고 기다린다. 진씨는 "무학위드의 출근 1등은 언제나 우리"라며 웃었다.
"아버지와 함께 일해서 좋으냐"는 질문에 두 손을 꼰 채 시선을 피해버리는 아들. 아버지 진씨가 "아들도 아버지의 정(情)을 아는지 예전 회사에서처럼 동료들과 싸우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아들이 결혼해 가정도 꾸리면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며 "이제는 '오늘 회사 식당에서 주는 계란이 맛있었어요' 하고 말할 만큼 밝아진 아들을 죽을 때까지 돌보는 게 꿈"이라며 활짝 웃었다.
 
<조선닷컴에서 전재, 정리>
 
 
#2. 딸의 아름다움에 빠진 아버지
 
 

“우리 딸 예쁘지요?”
칠순이 넘은 아버지는 마흔 넘은 딸을 이렇게 소개했다. 쑥스러워하는 딸의 만류에도 “내 눈엔 제일 예쁘다”며 막무가내다. 다정스럽게 자신의 팔짱을 끼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엔 사랑스러움과 안쓰러움이 함께 담겼다. 그의 딸은 뇌성마비 4급의 장애인이다.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났을 무렵 앓은 열감기 탓이다. 아버지는 딸의 장애를 ‘내 탓’이라고 했다.
“갓난애가 심하게 경련을 하는데도 ‘곧 괜찮아지겠지’ 했어요. 그렇게 그냥 살았지요. 그런데 세 살 때까지 걷지도 못하더라고요. 이상해서 병원에 데려갔더니 장애 판정을 내리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결심했다. 영원한 딸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로…. 이후 딸은 아버지의 1남3녀 중 가장 애틋한 자식이 됐다. 올해 서울시의 장한 어버이상 수상자로 결정된 배동병(78)씨와 딸 성은(43)씨의 이야기다. 서울 중구에 사는 배씨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자녀를 바르고 훌륭하게 키워낸 공로로 이 상을 받게 됐다.
40년 전 첫 장애 판정을 받을 당시 성은씨는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내 딸이 설 수만 있다면’. ‘걸어다니게 된다면’. 아버지는 이런 희망을 한순간도 버린 적이 없다. 전국을 다니며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녔다. 교회로 사찰로 다니며 기도도 했다. 힘들다고 칭얼대는 딸을 독하게 내몰며 걸음연습도 시켰다.
정성은 통했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부모 등에 업혀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이 3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장애인들과 같이 중·고교를 다니고 졸업했다. 결혼도 해 예쁜 딸도 낳았다. 그는 “힘들게 키운 딸이지만 이제는 중풍으로 쓰러진 제 엄마를 간호할 정도로 속 깊은 딸이 됐다”며 연신 자랑했다.
그러나 배씨가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한 이유는 자식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다.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장학금 지원을 20년 넘게 해오고 있다. 배씨는 “나도 가난으로 많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풍족하지 못한 살림이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폐품 수집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골목을 누비며 폐지를 모아 그 돈을 장학금으로 냈다. 지난 20여 년간 그가 낸 장학금으로 공부한 학생 수만 400명이 넘는다.
<중앙일보 조인스에서 전재>
 
 
#3. 아버지라는 ‘굴레’
 
한국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흔히들 ‘업’이니 ‘굴레’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래서 속을 썩이는 자녀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장애자녀는 그런 의미에서 부모의 업이 되고 나가서는 가정의 업이 되고 굴레가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내 아이를 위해 요즘 젊은 부모는 자신의 모든 것을 겁니다. 모태에서부터 성장까지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녀가 만약 장애라면…. 아마 세상이 무너지는 고통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위에 예를 든 두 아버지도 기사에서 보인 것처럼 세상이 무너지는 억장을 느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아버지는 그걸 이겨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위대함과 희생이었죠. 자신의 생활 속에 장애자녀를 거둬들인 것이죠. 결국 두 아버지는 장애자녀를 자신의 울타리에다 가둬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녀의 삶속에 스스로 뛰어들어 녹아들었다는 것이 바를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으로써 두 아버지는 실의보다 삶의 쾌감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위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동성(자유기고가. 전 경향신문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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