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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장애인들이여 대망을 가지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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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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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장애인들이여 대망을 가지자 #1 장애와 허들경기 젊은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맞서 취업을 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기’보다 더 어렵다. 하지만 의무고용제가 시행되고 또 장애인들의 혼신의 노력과 자기실력의 배양에 힘입어 점차 호전되고 있는 양상이라 반갑기도 하다. 장애인들이 허들경기와 같은 취업전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행조건이 맞아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첫째로, 우선 자신을 바로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즉 ‘나는 장애인이다’라는 사실을 명백히 인정하는 것이며 또 그것을 뛰어넘는 마음의 자세가 잘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음 두 번째로 ‘젊기에 공부하라’는 것이다. 우선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분야에 대해 남보다 몇 10배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겸손해지는 것이다. 장애라는 것은 결코 훈장도 치외법권도 아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비굴과 다르다. 자신을 아는 겸손이야말로 가장 큰 미덕이며 무기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아마 이러한 점을 잘 납득한다면 젊은 장애인들은 황야에서도 자신이 살아가는 능력을 갖게 되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자신의 힘으로 비장애인들의 세계에서 취업에 성공하고 또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물론 눈에 잘 뜨이지도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마침 한 신문이 이에 알맞은 기획을 함으로써 취업에 성공한 젊은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소게하게 되었음 밝힌다. #2. 장애인 취업 성공기 ▶롯데정보통신 김영태씨 = 지난해 롯데그룹은 장애인 고용을 확대하기 위해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입사지원서에 장애 유형이나 등급을 적지 않도록 하는 장애인전형을 도입했다. 그런데 서류전형과 인성검사를 통과한 한 지원자와 만난 임원들은 깜짝 놀랐다. 그는 양팔이 없는 지체 1급 중증장애인 김영태(27)씨였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 대신 발가락으로 분당 400타를 치며 자유자재로 프로그래밍을 하는 실력을 보여줬고, 거뜬히 면접을 통과해 정규직 프로그래머로 채용됐다. 6세 때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던 그는 아파트 옆 변전소 철조망을 타고 올랐다가 감전사고로 양팔을 잃었다. 좌절의 나날을 보내다가 마음을 잡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양팔은 없고 돌이킬 수도 없으며 나는 살아갈 뿐이다’. 이후 그는 낮은 탁자를 놓고 거기 발을 올려 발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고 연필을 쥐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컴퓨터 키보드도 발가락으로 쳤다. “공부를 곧잘 했어요. (장애인은) 다 그런 것 같아요. 몸으로 해선 이길 수 없지만 머리로 하는 건 이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더 (공부에) 매달리는 것일 수도 있고요.” ![]() 그에겐 양팔이 돼준 고교 친구가 있었다. 교실에선 책을 가방에서 꺼내 책상 위에 놓아주고, 식당에선 밥을 떠 입에 넣어준 친구다. 친구는 “함께 대학에 가자”고 했다. 둘은 인하대에 나란히 입학했고 ‘우정의 입학식’은 화제가 됐다. 그렇지만 김씨는 자신을 늘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세상이 싫었다. 주변 사람들은 양팔이 돼준 친구를 보며 “요즘 세상에 저런 (착한) 아이가 어딨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고마운 친구가 멀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맞아요. 당연히 할 수 없는 게 있죠. 양팔이 없으니까요. 그런 건 도움을 받아야죠. 하지만 그렇다고 도움을 받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왜 다들 장애인은 도움을 받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죠?” 실제로 대학에서 그는 학과 친구들 사이에서 ‘문제해결사’로 통했다.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는 프로그래밍만큼은 자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지난해까지 증권 거래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은 회사에 다녔다. 직원이 20명에 불과해 프로그래머들도 고객인 증권사로 나가 일했다. 김씨는 주로 내근을 했다. 자연스럽게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제외됐다. 남들이 해달라는 대로만 프로그램을 짜는 생활이 4년쯤 이어지자 프로그래머로서의 성장도 멈춘 것 같았다. ‘더 큰 곳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차에 롯데그룹에서 장애인 특별공채 공고가 떴다. 롯데정보통신 입사 후 그의 프로그래밍 실력은 빛을 발했다. 직원 수가 1,200명인 이곳에서는 외근을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의 주특기인 인트라넷 관리와 프로그래밍에서 충분히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발로 키보드를 칠 수 있게 만든 낮은 탁자 외엔 특별한 배려는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김씨를 비롯한 장애인 직원들의 성과에 만족한 롯데정보통신은 올해도 장애인을 뽑기로 했다. ▶SDS 융합솔루션플랫폼연구소 최광민(28) 선임 = 얼핏 전휠체어에 의지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떠올랐다. 입으로 조종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게임기 조이 스틱 같은 조종기기가 달린 전동 휠체어를 이리저리 운전하며 다니는 모습이 꼭 그렇게 보였다. 서울 삼성동 삼성SDS 융합솔루션플랫폼연구소에서 일하는 최광민(28) 선임의 첫인상이었다. 루션플랫폼연구소에서 일하는 최광민(28) 선임의 첫인상이었다. ![]() “몇 발자국 움직이는 데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오죽하면 화장실 가는 것도 참았겠습니까. 움직이는 것 자체가 남에게 부담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학창 시절, 그는 공부에 매달렸다. “머리로 하는 것만큼은 남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했다. 부모는 아들을 매일 학교까지 업어 등교시키며 뒷바라지를 했다. 어려서부터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컴퓨터를 좀 더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건 고교 때다. 온라인 세상에선 신체 장애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 관악고를 졸업한 그는 한양대 컴퓨터학과에 진학했다. 한양대엔 최 선임 외에도 다양한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있었다. 대학 측은 이들이 수강신청을 한 수업을 1층 강의실에 배정했다. 건물을 오르내리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이런 환경과 스스로의 노력 끝에 최 선임은 4.5점 만점에 4.1점이란 학점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교수들과 가족·지인은 대학원 진학을 권했다. “경쟁이 치열해 일반인도 낙오되기 십상인 기업보다 학계가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학문적인 연구보다 많은 사람이 쓰는 실용적인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기업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위의 만류에도 그는 기업 공채를 준비했다. 그리고 삼성그룹에 도전했다. 그것도 장애인 특별채용이 아닌 일반 채용을 택했다. 필기시험인 삼성직무적성검사(SSAT)를 볼 때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답안지에 정답을 채워 넣었을 뿐, 면접이나 토론 같은 다른 전형은 다른 지원자와 똑같이 치렀다. 삼성SDS 측은 “타자를 치거나 움직이는 데 다른 사람보다 시간이 더 걸렸지만 그 외의 점에선 일반인 경쟁자에 비해 뒤지는 면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에게 필요한 건 지하철 요금 할인이 아니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교육을 받았기에 그는 “혼자 걸을 수도 없는 몸으로 일반인과 경쟁하는 무모한 도전을 했고, 결국 성취해 냈다”는 것이다. 최 선임은 현재 삼성SDS에서 클라우드 서비스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최 선임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가 꼽은 행복의 조건은 두 가지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SKC&C이종석(34) 과장 = 2003년 고려대 컴퓨터학과를 졸업하고 1년간 20군데도 넘게 입사 면접을 봤다.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에선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면접에만 가면 여지없이 미끄러졌다. 친구들은 졸업과 거의 동시에 취직을 했는데도 그랬다. ‘이러다 영영 사회 진출은 물 건너가는 게 아닐까’ 싶은 불안감에 중소기업이나 생산공장 사무직까지 가리지 않고 입사 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결과는 늘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하나, 장애 때문이었다. ![]() SK C&C 이종석 과장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그는 신기술 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해내 올 초 과장으로 승진했다. SKC&C 이종석(34) 과장은 대학 졸업 후 구직 활동을 하던 1년여를 이렇게 기억했다. 사실 이 과장의 장애는 그다지 심한 편이 아니다. 뇌병변으로 똑바로 걷지 못하지만 그냥 서 있을 때는 이런 사실을 눈치채기 어렵다. 말할 때 얼굴이 일그러지고 발음이 부정확한 편이긴 하다. 그래도 프레젠테이션을 할 정도로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다. 이 과장은 “중증 장애가 아니고, 학창 시절에는 불이익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일자리를 찾으면서 벽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이런 적도 있다.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공장에 면접을 보러 갔다. ‘아무리 공장이라지만 면접인데’ 하는 마음에 넥타이까지 갖춰 매고 갔다. 하지만 정작 인사담당자는 이 과장을 훑어보더니 몇 가지 묻지도 않고 돌아가라고 했다. 당연히 채용되지 못했다. “이게 장애인 취업의 현실입니다. 경증 장애인이라고 해도 같이 일하고 싶어 하지 않죠. 뭐가 불편하다 꼬집어 말하지 못하면서도 막연한 거부감이 있는 겁니다.” 왜 면접에서 떨어질까. 발음이 문제다 싶었다. 말이 어눌하다 보니 상대방은 자신을 더 중증 장애인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볼펜을 입에 물고 매일 발음 연습에 매달렸다. 긴장하면 더 심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바로잡으려고 거울 앞에 서서 웃는 연습까지 했다. 노력은 열매를 맺었다. 2004년 SK그룹 공채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입사에 성공한 게 다가 아니었다. 1년 넘게 제대로 된 프로젝트에 합류하지 못했다. 입사 동기들이 사업 프로젝트에 속해 일하는 동안에도 그에게는 사내 웹페이지 관리와 복사·제본 같은 단순 업무만 주어졌다. “동료들도 반신반의한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별것 아닌 업무라 해도 주어진 건 완벽하게 완수하면서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1년 뒤 그는 ‘스마트카드’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신용카드에 IC칩을 내장해 무선 인터넷을 통해 결제할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신용카드를 ‘긁지’ 않고 단말기에 갖다 대기만 하면 결제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 과장은 이 시스템이 구동되는 기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업무를 맡아 5년을 일했다. 지난해 이 기술을 적용한 칩이 팔리면서 그는 올해 초 과장이 됐다. 입사 8년 만에 입사 동기들과 엇비슷하게 승진한 것이었다. 이 과장은 힘들 때면 늘 떠올리는 인물이 있다고 했다.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가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지적 장애까지 가지고 있던 포레스트 검프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바로 그 검프다. 검프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탁구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애플에 투자해 부를 거머쥐기도 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면 이 과장은 그저 묵묵히 제 갈 길을 갔던 검프의 삶을 되새긴다. “취업을 꿈꾸는 장애인들이 있다면 절대 포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공해야 어린 친구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니까요.” 자료 - 중앙 조인스닷컴 ‘장애인 취업 성공신화’ #3. 성공을 위한 마음의 준비 지금 젊은이들이 직장을 못 구해 방황하고 있다. 좋은 직장은 구하기도 쉽지 않고 구직자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룬다. 그러나 젊은 장애인들에겐 일할 수 있다면 좋다는 생각뿐이리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사람다운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끝으로 ‘고도원의 아침편지’의 한 내용을 전한다. 성공은 마술도 아니고 저절로 얻어지는 행운도 아니다. 성공은 모든 세세한 부분을 철저히 완성시키기 위한 지속적이고 강도 높은 노력에서 나온다. 어쩌면 평범한 인간사라고 할 수도 있다. - 로자베스 모스 캔터의 《자신감》 중에서 - 전 동성 (자유기고가. 전 경향신문 편집부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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