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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안전’이 과연 있을까?
작성자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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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안전’이 과연 있을까?
 
 
전동성(자유기고가, 전 경향신문 편집부 국장)

세월호 참사에 이어 장성요양병원 화재 등 4월과 5월 두달 새 세상이 경동할 만한 사건들이 우리 마음 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패닉상태에 빠트리고 있다. 만약에... 만약에 장애인 시설이나 장애인 가정에서 사고가 생긴다면... 이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이야기라고 비난할 지도 모르겠지만 건강한 사람도 무지막지하게 수몰되는 참극 속에 또 만약에 그 속에 장애인이 있었더라면 장애인을 위한 구조의 손길을 기대할 수가 있었을까? ‘안전’이 저만치 뒷걸음친 그곳에 장애인 안전이란 말도 붙일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와 장성 요양병원 화재 사건>
 
“장애인들은 제집 안에서만 놀아라.”
“장애인들은 사람이 모이는 곳엔 가지마라.”
“장애인들은 보호자 없이 다니지 마라.”
 
어디를 가든 ‘장애인 출입금지’ 푯말이 있게 될 것이라는 상상도 가능하다. 장애인 자체가 위험물인 듯 모두가 혐오대상이 되거나 기피대상이 된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치매노인들의 손발을 결박하듯 ‘금지’가 가장 안전한 예방법이 되리라는 예상도 해본다. 그동안 어렵사리 낮춰진 건물의 문턱이 다시 무릎높이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건강한 사람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부조리가 어떻게 곁가지 같은 장애인들을 위한 빈자리를 만들 수 있겠는가. 입법을 책임지고 있는 국회는 장애인 안전법이라는 두루뭉실한 법률을 몇 년째 서랍 속에 쟁여놓았다가 어느 날인가 폐기처분하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럴 적마다 장애인들은 배신감과 박탈감에 비명을 지른다. 왜 그러하냐면 ‘우는 아이 곶감 한 개 더 주는 인심이 서럽기 만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은 보호받을 대상이 아니라 유리동물원 속의 ‘전시물’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안전은 ‘시혜’가 아닌 ‘수혜’의 차원에서 길이 되새겨 볼 때가 되었다. 장애인들에겐 그것이 당연한 ‘받을 권리’로써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불이난 아파트의 한 구석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다 연기에 질식되고 온몸에 화상을 입고 숨지는 비극을 더 이상 묵과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성한 사람보다 행동이나 지각이 뒤떨어지는 장애인들에겐 주위의 모든 것이 흉기로 돌변할 수가 있다. ‘약자 보호’는 인류애의 숭고한 도덕이다. 어려울수록 도와가자는 박애의 정신이 그런 위험에서 약자들을 보호할 수 있게 한 것이 인간의 정신이기에 인간은 숱한 재해와 고난 속에서 꾸준히 진화해온 것이다. 인간의 진화야말로 인간다움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참담한 사건 속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작업이라도 다시는 그러한 우매하고 어리석은 일들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성인들을 온전하게 보호할 수 있듯이 장애인들도 완전히 안전 속에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의 증표들을 기대한다. 다시는, 다시는 우리를 처참하게 매몰시키는 일들이 재발하지 않도록 단단히 다져달라는 것이다. 복지는 선심이 아니다. 한 곳이라도 눈물을 닦아주고 한 사람이라도 희망을 주는 정책이 바로 복지의 시작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부축하는 것이 복지의 시행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 속에 숨져간 꽃 같은 젊은 영혼을 위해 다시 한 번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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