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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쩍벌남’은 지하철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작성자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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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쩍벌남’은 지하철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박준범(YTN라디오 PD)
  지하철 ‘쩍벌남’이라는 신조어가 나온 지도 벌써 14년이 됐습니다. 지난 2004년 처음으로 지하철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남자의 사진이 SNS로 전파되면서 지하철 ‘쩍벌남’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시작됐습니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지하철에서 이 ‘쩍벌남’ 때문에 소란이 생기는 걸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지하철에서 ‘쩍벌남’이 문제가 되는 건 물론 주위 승객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원인을 조금 더 깊이 따져보면, 아마 ‘권한’과 ‘권리’, ‘배려’ 등 사회심리학적 요인들이 뒤섞여 있을 겁니다. 지하철의 좌석은 보통 7명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7명의 자리는 누구나 똑같은 넓이로 앉을 수 있도록 구성돼 있습니다. 더 넓은 자리도, 더 좁은 자리도 없습니다. 물론 더 높은 자리도 더 낮은 자리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만큼만 권한이 주어진 것이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사람들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죠. 결국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다면 지하철에서 ‘쩍벌남’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을 붉히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몇 달 전 서울시가 조사한 ‘서울시 공공갈등 인식’에 따르면 공공 관련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을 묻는 말에는 가장 많은 응답자가 ‘서로 배려하는 성숙한 민주적 시민의식 부족’(39.1%)을 꼽았습니다. ‘정부불신 등 사회신뢰 부족’(37.8%), ‘법과 제도, 절치의 미비’(21.7%)보다 높았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갈등이 시민들의 의식 문제라고 받아들이는 조사결과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에만 의지하기에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다수의 권리 보호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배려란 타인에 대해 본인이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권리나 권한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히 지켜져야 할 사회적 규약의 수준으로 격상될 수 있기 때문에 ‘쩍벌남’ 문제를 배려의 수준으로 가져가는 것은 순진한 발상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직장 내에도 ‘쩍벌남’은 있습니다. 본인의 권한과 권리를 넘어 타인의 영역까지 침범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직장 내 ‘쩍벌남’일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직장 내 분위기가 좋지 못합니다. 직장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거나, 아니면 체념하고 그냥 손해 보며 살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장애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상에서 만나는 비장애인들이 ‘쩍벌남’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난 5월 1일 노동절의 일입니다. 대구시에서 장애인들이 빵과 장미를 들고 최저임금 보장과 공공일자리 제공 등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국민과 직접 소통을 강조하는 청와대 홈페이지는 장애인 접근성이 취약해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청와대 홈페이지 및 브리핑 등 수어 등 미제공’ 차별진정을 넣으면서 장애인 알권리를 적극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 브리핑, 현장 영상 등이 제공됨에 따라 국민들의 알권리가 한층 늘어난 듯 했지만, 시·청각 장애인들의 생각은 달랐던 거죠. 뿐만 아니라 11년 만에 펼쳐진 남북정상회담을 중계한 공중파 TV 방송 3사 중에 SBS가 실시간 중계를 하면서 수어통역을 하지 않아 청각장애인들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집단과 개인의 도덕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내 행동이 소속 집단을 대표한다.’는 의식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왜냐면 아무 소속 없는 개인은 일상 행동에서 스스로를 잘 통제하지 않게 되기 때문인데요, 우리나라 시민들의 공중도덕, 시민의식은 그 자체로서의 내재적 의미보다는 타인에게 비치는 이미지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하철에서 만나는 ‘쩍벌남’ 때문에, 혹은 직장 내에서 만나는 ‘쩍벌남’ 때문에 속상한 기억이 있었다면, 혹시 우리 스스로는 누군가에게 ‘쩍벌남’이 된 적은 없는지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하철 좌석처럼 더 넓지도, 더 좁지도 않은 게 우리 사회에서 약속된 심리적 좌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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