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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의 가족으로 살아가기? 살아내기!
작성자 장애인직업안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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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의 가족으로 살아가기? 살아내기!

: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전혜연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

 

가뭄 위 사진 이미지

 

얼마 전 인터넷에서 한 뉴스기사를 보았다. 한 발달장애인의 아버지가 긴급지원을 요청하며 올린 호소문이 기사화된 것이었다. 30대의 발달장애인과 60대 부모로 구성된 이 가족은 최근 반복적인 실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심리적 불안과 공격적 성향을 보이는 아들을 돌보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활동보조나 자립지원 서비스 등을 이용하려 하였으나 적절한 인력과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없었고, 부모 중 아버지가 아들의 공격행동에 상처를 입고 치료를 위해 갑자기 입원하게 되면서 수술을 앞둔 어머니가 아들을 혼자 돌보게 된 위기상황에 몰리게 되자 언론, 시청, 정부 등을 대상으로 호소문을 배포하게 된 것이었다(관련 기사 : 벼랑 끝 발달장애인 가족, “제발 살려주세요”- 에이블뉴스 2018.6.25.).

발달장애인 가족의 주변인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이 기사의 사연이 새롭거나 낯설지가 않다.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나의 사촌동생은 지적장애 외에도 정서적인 문제와 행동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혼자 사촌동생을 24시간 돌보고 있는 이모는 종종 하소연 섞인 전화를 엄마에게 걸어오곤 하셨다. 사촌동생이 30대에 접어들고 이모가 나이가 들면서 이모는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친 기색을 보였고, 최근에는 사촌동생을 잠시 친척집에 맡기기로 하셨다고 했다.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사촌동생이 없어졌다는 소식이 곧바로 들려왔고, 지방의 친척집에서 사라진 사촌동생은 사흘 만에 홀연히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모의 가족은 다시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갔다. 발달장애인의 가족으로 살아내던 그 모습으로.

그 가족이 아닌 주변인인 나로서는 사촌동생을 돌보는 가족의 모습이 답답하게 보일 때가 많았다. 왜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았는지, 왜 어릴 때부터 사회적응이나 직업적응훈련을 시키지 못했는지 등등. 하지만 내가 그 짐을 나누어 질 용기와 책임감이 없었기에 방관자이자 주변인으로 남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촌동생 가족을 생각하면 답답함과 안쓰러움과 죄책감을 느낀다.

 

보호 이미지

분명 사촌동생이 어린 시절에 비하면 최근에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서비스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제도나 서비스 혜택이 늘어났다고 해서 발달장애인 가족으로 살아가는 팍팍한 삶이 갑자기 확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구들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접근하기에는 여전히 자원이 너무도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활동보조서비스가 생기고 정부와 지자체에서 지원을 하고 있지만 행동상 문제를 가지고 있는 발달장애인이나 지적장애인에 대해서는 활동보조서비스가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집밖에서 성추행이나 신분도용, 사기 등에 연루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가족들의 불안을 과연 현재의 활동보조 서비스가 얼마나 안심시켜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성인 발달장애인에게는 활동보조라는 명칭보다는 일상지킴이(?)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앞의 신문기사의 발달장애인 아버지 호소문에는 발달장애인의 부모로서 경험해온, 경험하고 있는 절박함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그 절박함을 함께 공감해보고자 호소문의 일부를 공유해본다.

 

“(전략)
너무나 가슴이 막막하고 답답합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럽습니다.
제도와 서비스가 있으면 무엇합니까?
저희가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없어
저희는 오롯이 저희 가족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살고 있습니다.

제 아이가 지역에서 갈 곳이 있고
그 곳에서 지금까지의 상처가 아물어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저와 아내도 칠순을 앞둔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고 노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중략)
제발 저희 가정을 구제해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벼랑 끝 낭떠러지에 매달려 떨어지기 직전입니다.
간절히 호소합니다. 방안을 마련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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