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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할 때 있으면 좋은 것들
작성자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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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할 때 있으면 좋은 것들

기지혜(이화여대 박사수료)

 

Ⅰ. 아주 예전의 일이다. 인도의 뭄바이 시내 중앙역 안에서였다. 뭄바이가 인도의 수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부산 같은 항구도시...정도의 아주 가벼운 인상만을 지닌 채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역 안에 가방을 베고 바닥에 누워버린 사람, 나무기둥처럼 세워둔 여행자의 가방, 보릿자루 같은 짐짝 그리고 줄에 메인 염소들 사이로 그 공간을 용케 옮겨 다니던 중이었다. 그 때 같이 있던 한 사람이,

  “어 여기는 이렇게 되어 있구나”

가리키는 곳을 보니, 화장실이 아니라 역 안에 수도꼭지가 달린 세면대 같은 것이 길게 놓여있었다. 수돗가였다. 평소에 사용하는 수돗가보다 조금은 낮은 높이로 느껴졌다. 당시 직접 높이를 재본 것도 아니고, 그저 수돗가 앞에 마주해본 것뿐이었지만, 사용감이 평소랑은 달랐다. 손에 물을 받으려고 서게 되는 자리도 그렇고, 발의 위치도 어색하고, 책상 같은 높이라고 해야 할지. 일부러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사용하도록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높이가 상당히 낮은데?”
  “휠체어 타고 온 사람이나 몸이 조금 불편한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날 일행 중 한명이 수돗가에서 물을 먹었었는지 물을 받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흘러도 기억에 남는 건, 어떤 느낌 같은 것인데 ‘감수성’ 같은 것이다. 이 정도 높이라면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이 손을 뻗어 물을 받거나 세수를 할 수 있을만한 폭(거리)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혹은 그걸 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높이가 너무 낮아서 이상해,가 아니라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게 높낮이를 다르게 하여 설치해 둔 그 도시의 기차역 공간이 달리 보였다.
  이동이 부자유하거나 불편한 사람들이 거리에서, 일터에서, 쇼핑공간에서 쉽사리 보이지 않는 것 뿐이라면, 함께 일하는 공간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능력,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보이게 만드는 능력, 어쩌면 ‘초능력’같기도 한 이 능력을 나는 ‘감수성’이라고 생각한다.

Ⅱ. 이러한 감수성이 하루아침에 기적처럼 심어지는 것이 아닐 것 같다. 물론 주변의 사람을 통해서나 이야기를 통해서 ‘아, 맞아, 그렇구나, 그랬구나’ 하며 강렬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하더라도, 번번이 새롭게 다가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무색해진다. 한번은 직원용 구내식당이 있는 직장에서 일을 할 때였다. 옆 부서의 사람들과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구내식당에 가서 먹고 오자는 말이 무색해진 적이 한 번 있었다.
  구내식당.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없이 식판을 두 손으로 들고 천천히 걸어가서 이미 차려진 음식을 직접 담아 빈 자리로 걸어와 앉아서 먹으면 되는 비교적 간편한 공간으로 인식되곤 한다. ‘빨리’ 먹고 ‘빨리’ 나올 수 있는 곳이다.
  한번은 일하는 곳에서 점심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여느 때처럼 구내식당이 일번으로 떠올랐는데, 다른 한 분이 밖에 나가서 먹자고 하는 것이었다. 구내식당이 더 가깝고 ‘금방’일 텐데 하면서도 밥 먹고 걷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 일행 중 한 분이 문자로 식사장소에 미리 가 있겠다고 하는 것이다. 한쪽 다리가 불편하여 항상 목발을 사용해야 하는 분이었다.
  이 날 점심을 먹고 오는 길에서야 알았다. 구내식당이 빠르고 편하다고 느끼는 쪽은 비장애인이라는 것을. 장애인에게 구내식당은 번거롭고 두 손을 다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에 구내식당의 절차는 번거롭기 그지없다는 것을.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는 줄을 서서 ‘천천히’움직이는 것이 천천히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밥을 먹고 ‘산책 겸 근처 카페로 바로 이동할까요?라는 말이 툭 나왔다. 그러자 아까 식당에 먼저 가 계셨던 분이 “선생님, 저랑 같이 다닐 때에는 시간을 제게 좀 더 주셔야 해요” 라며 일러주신다. 다행히 함께 간 일행 중 한 사람은 나보다 더 능숙하게 점심 약속 동선을 잡고, 시간을 ‘함께’사용하는 면에서도 더 나아 보였다. 일단 서두르지 않았고, 보폭을 맞췄으며 무엇보다 기다릴 줄 알았다.
  도전이라는 것이 주변의 사람들이 해 왔던 만큼 할 수 있다고, 그리 하라고 등 떠미는 것이 아니라 도전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이 갖춰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반적’이라고 알려진 시간의 속도와 공간의 모습이 장애인에게 시도하고픈 마음을 내려놓게 하거나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내야 하는 ‘도전’이 되는 시공간이라면 함께 일한다는 말이 무색해질 것도 같다. 조금 진부하지만 중요한 말, 동행이라는 것(함께 한다는 것)이 우산을 씌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말을 안 것은 아주 오래 전이지만, 그게 이런 말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동료들과의 점심시간에서 배운다.

  ‘내가 해 줄게, 내가 한 것처럼 하면 돼’라는 말보다 더 힘이 나는 말은 ‘같이 해보자’라는 말이라고 하던가. 내 속도만큼, 내 보폭만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자기 시간의 속도’로 같이 마주하는 공간이 많아질 때 오히려 (장애인 고용, 사회참여와 같은) 인식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일하고 일방적인 규칙만 있는 사회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더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일을 한다는 것이 대부분 어떤 공간으로 이동하여 일을 하게 된다 이른바 ‘일터’라는 곳이다. 내가 그 일터에 가기 전부터 그 공간은 그저 원래 그렇게 생긴 것이고, 지금의 모습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 같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일하는 일터의 물리적 환경 – 건물의 경사, 계단의 형태, 엘레베이터의 면적이나 버튼의 위치 등 -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저마다의 시간의 속도에 대한 감수성을 갖추는 노력은 커다란 비용 없이도 비장애인이 “도전해볼만한”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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