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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학교에도 미술시간이 있나요
작성자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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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학교에도 미술시간이 있나요
엄정순(시각예술가, '우리들의 눈' 디렉터)
음악시간은 이해가 되는데 맹학교에 미술시간도 있나요? 안 보이는 데 미술을 한다고요? 만들고 그리고... 사진도 찍는다고요? 어떻게요? 사람들은 갸우뚱합니다.

미술실 안을 잠시 들여다볼까요. 교실 안은 학생 반, 교사 반으로 북적거립니다. 학생들은 교실 한 가운데 펼쳐놓은 커다란 종이 위에 주저앉거나, 아예 엎드리고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본 따서 아바타마네킹을 만들고 자신의 몸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대형 사이즈로 확대해서 만들어보기도 합니다. 실제크기의 10배 이상 큰 척추, 송곳이, 눈썹을 만들고 있네요. 야구장에서 들은 엄청난 함성이 잊혀지지 않아서 응원하고 있는 작은 사람모양을 100개 이상 끈기 있게 점토로 만들고 있는 남학생이 있습니다. 흠- 좋은 냄새가 나네요. 반 고흐 그림의 설명을 듣고 그 내용을 향과 색으로 표현하는 조향수업, 과학실에 있을 법한 실린더, 비이커 등의 향 제작 도구들과 씨름하고 있는 학생들의 표정은 진지합니다. 카메라를 한 대씩 들고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나가고 있네요. 사진수업입니다. 패션수업도 합니다. 패션디자이너와 함께 옷 만들기도 하고 자신이 디자인을 한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패션쇼를 하는 그런 미술시간입니다. 손은 쉼 없이 움직이고 학생들이 쏟아내는 이야기와 웃음으로 시끌벅적합니다.




이렇게 생기가득한 수업도 처음에는 난관이 있었습니다. “안 보이는데 미술을 해서 뭐합니까, 그 시간에 안마나 영어를 해야지.” 20년 전 맹학교 미술시간을 시작할 때 많이 들었던 반응이었습니다.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미술을 콤플렉스 과목이라고 고백합니다. 학교도, 학생도, 사회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미술이 곧 시각이란 생각이 깔려있어 미술은 할 필요도, 할 수도 없는 쓸데없는 수업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미술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의 눈>소속 예술가들의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미술, 즉 이미지를 만들고 활용하는 것은 시각을 포함한 오감의 결과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미지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시력여부에 상관없이 미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눈>은 찾아가는 미술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맹학교의 정규미술시간을 맡아 20년간 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입시와 관계없는 과목이라서 학생들이 미술을 재미있게 경험하는 교과서에 없는 실험적인 시도들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예술가들과 함께 하는 시도들은 학생들이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다는 자각과 미술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좋은 방법이라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들의 눈의 미술커리큘럼은 학생들이 오감의 다양한 자극과 배움을 통해 자신의 감각을 믿고 미술이 어렵거나 무관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의식주와 관련된 것임을 조금씩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학생들이 만들어낸 작품은 우리의 기대를 넘어선 매우 창의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미술시간을 경험한 학생들 중에는 미술대학에 진학한 학생도 있습니다. 세상의 금기에 도전을 한 것입니다. 그 학생은 맹학교 미술교사가 되어 모교에 다시 올 수도 있습니다. 이미 외국에는 화가, 마라토너, 산악인, 요리사, 사진작가, 컴퓨터프로그래머, 정치가, 영화감독, 조각가, 교수 등등 다양한 직업으로 활동하는 시각장애인들이 많습니다. 미술의 경험으로 전문가의 길을 찾은 사람들도 제법 있습니다. 침술가이면서 화가로 비엔날레 참가 등 글로벌 미술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느 일본작가는 미술관은 나와 관계없는 장소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스스로 미술관을 찾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진작가 앨리스윙월(Alice Wingwall)은 ‘나는 시력을 잃었지만 시각화할 능력을 잃은 것은 아니다’라고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뉴욕 월가의 애널리스트(증시분석가)로 활동하는 시각장애인 이순규씨는 애널리스트란 직업은 기억력 훈련이 잘 되어있는 시각장애인에게 아주 잘 맞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한결 같이 자신의 눈을 믿는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맹학교 미술시간은 상식과 무관심의 틀에서 보면 여전히 쓸데없는 수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술시간을 실제 경험한 이들의 고백은 아주 다릅니다. 매시간 아이들은 미술실 밖에서 수업 시작을 기다리고 서 있습니다. 2시간 수업 내내 화장실 가는 것도 참고 만들기에 집중합니다. 무엇 때문에 보지 못하는 학생들이 미술시간을 좋아하고 기다릴까요?

“지금은 침구사로 일하지만 맹학교에서 받은 미술시간은 내가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사는 자존감을 알게 해 주었다” -어느 시각장애인-

미술은 자기표현을 시도하는 시간입니다. 단순히 그리기, 만들기를 하는 활동 이전에 생각하는 느낌을 배우는 시간이고, 질문을 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작과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고, 자기 표현력을 키워서 남과 다른 자기만의 눈을 찾아가는 시간입니다. 시각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자신의 고유한 눈으로 인한 개성과 능력을 통해 다양한 직업에 도전하길 응원합니다.

*우리들의 눈 / Another way of seeing(1996~)은 시각장애인미술교육과 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아트플랫폼입니다. 미술교육프로그램, 전시, 촉각책 제작 등을 중심으로 오감회복을 위한 다양한 아트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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