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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대학가요제 Forever>를 보고
작성자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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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대학가요제 Forever>를 보고 
 
이 설 야(시인, 칼럼니스트)
 
2013년 10월 24일 세종문화회관대강당.
어둠으로 꽉 차 있던 무대에 희미한 조명이 들어오고 엷은 커튼 사이로 악기들과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튼이 열리면서 회전 무대는 90도를 돌아 통기타로 창작 포크송의 반주가 시작되면서 관객들은 탄성과 함께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 매혹적인 기타반주를 직접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이 곡은 1977년 정동의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MBC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민경식, 정연태, 민병호 3명으로 구성된 <서울대 트리오>의 창작 포크송인 '젊은 연인들'이며, 당시 큰 인기를 끌며 동상을 수상했던 곡이다. 통기타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이 곡의 가사와 기타 반주가 좋아 고1 시절부터 많이도 들었다. 지금도 미사리나 생음악을 많이 하는 곳에 가면 이 곡을 신청해 들을 수 있다.
 
노래를 끝내고 무대 중앙으로 나오자, 무대 옆에서 나오는 청바지 차림의 한 남자가 있었는데, 이 날 사회를 맡은 임백천씨였다. ‘서울대 트리오’란 팀명은 당시 대학가요제 담당PD가 팀명이 없던 이 팀에게 ‘서울대 트리오’로 하면 어떻겠냐고 해서 즉석에서 붙여진 팀명이라고 했다.

1978년 제 2회 때는 노사연의 ‘돌고 돌아 가는 길’이 금상, 배철수 그룹 활주로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가 은상, 임백천, 고영선 뚜엣 ‘한마음’이 장려상을 탔으며, 그 유명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은 미입상 곡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이 사람들은 한국가요계에의 대단한 뮤지션으로 우뚝 서 있다. 7080세대라면 이 네 사람이 부른 노래가 당시 얼마나 애창되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이는 당시에 참신한 건전가요가 드물었고, 파격적인 형식 파괴가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며, 그룹사운드의 대중화를 앞당긴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7년의 1회 대회를 시작으로 2012년까지 36년간 계속되어 온 대학가요제는 청년문화를 이끌며 대학 문화의 순수성과 현실을 반영한 시대정신을 노래로 풀어내는 대한민국 가요계의 지각변동을 일으키던 음악축제였다.

이번 무대는 2013년에 그 맥이 끊긴 대학가요제의 2014년 부활을 위한 기금마련을 위해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 30여 팀이 같은 무대에 서는 보기 드문 축제의 공연이다. 출연자들이 3일 동안 무상출연을 하는 2013 대학가요제 Forever는 당시 입상한 오리지널팀 및 멤버들이 모여 세월이 갈수록 더 빛나는 감동의 순간들을 재연하였다.

물론 대학가요제 출전을 계기로 가수로 활동하거나 음악 계통에 일을 하는 대학가요제 출신자들도 많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대회 후에 음악과는 다른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입상자들도 많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대학가요제가 젊은 가수를 선발하는 등용문이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대학생들이 음악을 서로 나누고, 그 시절의 낭만과 대학문화가 녹아든 독특하고 때 묻지 않는 음악의 경연장임을 알 수 있다.  
 
옛 노래들은 변함없는데, 그들도 나도 청춘을 세월에 야금야금 갉아 먹히고 반백의 중년이 되어있었다. 주옥같은 곡들에 참신한 노랫말은 아이돌이다 뭐다 하는 젊은 가수들의 낙서 같고 일기장의 푸념 같은 가사들로 바뀌고, 몰개성의 외모는 공장 주물틀에서 찍어낸 것 같이 남.녀 성별만 구분되는 비슷비슷한 얼굴로 성형을 해 누가누군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는 실정이다. 대학가요제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암울한 시대상임에도 낭만과 수수한 멋을 간직하였다.

여름방학 때는 산이나 바다 개천에서 야외전축에 해적판 LP를 걸어놓고 팝숑과 상쑝, 가요들을 들으며, 더 이상 깨끗할 수 없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캠핑도 즐겼다.

우리의 놀이문화에서 노래만큼 비중이 큰 것 또한 없었다. 당시, 음악 테입 사기도 쉽지 않던 시절, 레코드사에 녹음할 곡을 주문해 녹음하여 듣던 시절도 있었다. 당연히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한 곡들은 급속도로 인기를 탔고 대학 캠퍼스에는 가타를 치거나 노래를 하는 낭만파들이 많이 생겨났다. 음악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감성을 배가시키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다시, 공연의 중반부. 생소한 이름의 정오차씨가 ‘바윗돌’을 폭발적 가창력으로 불렀다. 노래를 듣고서 객석에서 함성이 터지고 박수장단이 흥겹게 공연장을 꽉 채웠다. 81년도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이며 힘이 넘치고 메시지가 강렬한 곡이었다. 정오차씨는 가요계로 나가지 않고 은행원이 되어 아직까지 은행에 근무하는데, 공연전날 척추수술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에너지로 자신의 곡을 노래하며 2013 대학가요제 Foever의 공연 취지에 힘을 실어 주었다.

당시,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지 얼마 안 되어 정오차씨는 TV쇼에 출연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 때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곡이며,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는 말을 했다가 이 노래는 바로 금지곡이 되었고, 정오차씨는 강제징집으로 군 입대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의 기억에 정오차씨는 사라져갔다. 그런데 마지막 후렴 부분인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은 귀에 생생하다. 공연 전체를 통틀어 가장 힘있는 노래였다.
 
 
공연은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고, 대학가요제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제1회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인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의 기타 이영득외 5명으로 구성된 그룹사운드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는 그 위상에 걸맞게 공연으로 제일 마지막 곡으로 연주되었다. 비트가 강하고 심장을 두드리는 듯한 드럼 장단에 맞춰 ‘나 어떡해’가 시작되자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두 손을 흔들며 곡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환호의 거대한 물결이었다.

우리는 그 당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저항하던 직·간접적인 민주투사였고, 개발도상국인 조국의 산업역군이었으며, 혹독한 IMF를 견뎌내었고, 지금은 시대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50대 중년으로 공연 관람객의 대부분을 채웠다.

1977년 1회가 시작된 대학가요제는 2012년 36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는데, 주관사는 시청률 저조와 인기하락을 폐지 이유로 삼았다. 이는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국가 지도층에서는 문화융성이니 문화예술의 발전이니 하는 청사진을 제시하는데, 36년이나 된 대학생들의 큰 문화행사 하나가 이렇게 중단되어도 먼 산 보듯 하고 있다. 36년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를 여타 이유로 폐교한다면 졸업생들은 순응할까?

아무튼, 이번 <2013 대학가요제 Forever>공연이 대학가요제의 지속적인 개최에 큰 힘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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