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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우리 봉사단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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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우리 해외봉사단 1기 – 2014 캄보디아 다름을 인정할 때, 공감이 시작된다.
행복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다.
1기 유승엽
지구반대편을 따사로이 비추고 돌아오는 태양빛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침을 먼저 맞이하는 새 소리의 정겨운 울음소리가 청각을 맑게 해준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텁게 빛을 차단하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가고 한동안 어둠에 숨겨왔던 망막이 빛과 조우한다. 그러나 밝은 빛 때문에 다시 눈을 감았다. 빛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눈을 떠본다. 방 한가운데 천장 위를 봄으로서 내 비전은 하루를 시작했다.



이곳은 로터스월드. 내가 캄보디아에서 5일간 신세져야할 곳이었다.

─2013년 여름, 야자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던 중 우연히(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르는) 동아리 선배를 만났다.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선배에게 해외봉사라는 키워드가 부상으로 걸린 공모전을 소개받고, 우리는 ‘420(*4월 20일 = 장애인의 날)’ 이라는 숫자를 이리저리 가지고 논 영상을 출품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은 대상이라는 가치를 품게 되었으며, 이것이 발단이 되어 우리는 캄보디아로 가게 되는 기회가 주어졌다.
반년 후, 2014년이 되어 우리는 최우수, 우수상을 수상한 사람들과 함께 인천국제공항에서 발대식을 올렸다. 나로서는 처음 가보는 해외가 무척이나 설레고 기대되었다.
간단한 거 같아도 복잡한 절차를 거친 후 우리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0,000피트 상공에서, 제트기류라는 참으로도 즐거운 진동과 함께 우리는 그렇게, 타 문명으로 이동했다.─

로터스월드에서의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전날 캄보디아에 도착을 했을 때엔 이미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로터스월드에 오자마자 바로 숙소에 들어가 취침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기 때문에 날이 밝자마자 나는 숙소 주변을 탐방했다. 일단 주변을 훑자마자 떠오른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평화롭다.’ 이었다. 산업화되어있는 우리나라에서 농촌에 들어가 평화롭다고 느끼는 것과는 다른 평화로움이었다. 캄보디아가 행복지수가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는 게 확실하게 와 닿았던 순간이었다.
내가 느낀 캄보디아의 날씨를 긴급 발표하자면, 기온 35도, 습도 100퍼센트.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이므로 직사광선이 좋아라하며 지표면을 강타했다. 이러한 환경요인은 야외봉사활동을 꺼리게 한 것은 사실이다.

첫 봉사활동은 밥퍼였다. 말 그대로 밥 퍼는 봉사였다.

운 좋게도 작업은 실내에서 이루어졌다. 실외봉사도 있었으나 그늘진 곳이라 직사광선에 의한 원치 않는 썬텐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운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평소 영상제작을 좋아하는 나는 현지에서 활동한 내용을 영상에 담기위해 카메라를 가져왔는데, 봉사하랴 촬영하랴 부랴부랴 움직이느라 진땀을 뺐다. 오백여명의 아이들을 위해 오백여 번의 밥을 퍼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더구나 갓 지은 밥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땀구멍 열어주는 활성제라도 함유된 듯 더위를 증폭시켰다.

내가 캄보디아에서 현지인들과 대면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봉사하다가 중간 중간 말은 거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도통 뭐라는지……. 듣기로는 인사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욕지거리 하는듯한 어투도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터리. 앙코르와트 다음으로 영구미제로 남을 수수께끼였다. 밥을 퍼는 일이 끝나고 허겁지겁 식사하는 아이들을 보니 학교에서 급식하는 한국 학생들의 모습이 사뭇 뇌리를 스쳤다. 급식아주머니도 같은 고생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밥퍼활동은 아이들을 위해 밥을 제공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나이든 할머니, 할아버지도 오시는 것을 보고 마음 한 쪽에 쓰라림을 느꼈다. 그들의 발을 보면 공통적으로 진흙색의 무언가가 묻어있었는데, 이것이 병인지 흙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생활이 어떤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후 로터스월드로 돌아와 우리가 캄보디아에서 해야 할 메인임무, '영상제작'활동에 착수했다. 우리는 A팀, B팀으로 나뉘어 로터스월드의 현지친구들과 함께 영상을 만들기로 하였다. 나는 A팀이었고, 나포함 4명의 한국인과 4명의 현지친구들이 같은 팀을 이루어 캄보디아에서의 첫 영상을 기획하였다. 글로벌로 진출하여 만드는 영상은 그 어떤 때보다 즐거웠다. 함께 기획하고, 함께 촬영하며 현지친구들과는 빠른 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물론 의사소통도 쉽게 전달되었다. 어색한 영어와 적절한 바디랭귀지와 함께.

촬영은 로터스월드에 온지 4일째 되는 날까지 진행되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은 ‘로터스 히어로’. 네 명의 히어로가 로터스월드의 평화를 지킨다는 80년대 초등학생이 좋아할만한 콘티였다. 우리는 편집프로그램의 간단한 기능으로 그들을 히어로로 만들었다. 예로 말하자면 쓰레기를 던져 수십 미터 떨어진 쓰레기통에 정확히 넣는다든지, 달리는 장면을 4배속하여 초고속질주를 연출한다는 등으로. 이러한 웃음요소는 로터스월드아이들의 함박웃음으로 대성공을 이루었다.

이번 영상제작 활동은 단순히 노동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닌, 아이들에게 꿈을 주고 경험을 주어 새로운 도전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재능기부였다. 그리고 그 활동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로 다음 날 로터스월드를 떠나야 했다. 친해진 현지친구들과도 헤어짐이 아쉬워 마지막까지 서툰 영어로 대화하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일부 친구들은 편지와 함께 선물도 주었고, 페이스북 이메일 등을 교환하여 귀국해서도 소식을 듣기 원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짐을 챙겼다. 그 날은 로터스월드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였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씻기를 뒤로한 채 친해진 현지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위해 로터스월드 곳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등교한 후였다.

로터스월드를 떠나고,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보냈다. 캄보디아의 시내도 가보고 일상을 보내는 주민들도 보았고,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앙코르와트도 방문했다. 주민들은 한국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틈 사이로 강만 보여도 집값에 프리미엄이 붙는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전망 좋은 수상가옥을 양보한다. 또한 그들은 배 엔진에 시동만 걸면 주거이동의 자유가 확실히 보장된다. 창문만 열면 이웃들이 보이고 높은 건물 하나 없어 매일같이 지평선 너머라는 예술 같은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가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이 행복한 이유에는 돈이 포함되지 않았다. 행복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다.
소유는 사치일 뿐이다. 사치는 일시적인 만족일 뿐이다.
우리가 그들보다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이유는, 그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