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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우리 봉사단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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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우리 해외봉사단 3기 – 2015 스리랑카 함께 나아가는 우리, 축복입니다.
인도양의 눈물에서 스리랑카의 미소를 찾아냈다
3기 김선아
인도양의 눈물엔 기쁨이 녹아있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도 같은 따뜻한 그들의 마음, 투명하게 반사된 바닷물과 같은 기쁨의 눈물이 내게 밀려와 나를 바꾸었다.

'편견' 이라는 단어 하나는 너무 커다란 벽을 쌓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벽을 깨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나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런 내게 기적과도 같은 특별한 일이 찾아왔다. 학교 게시판에 붙여져 있던 포스터를 보고 우연히 참가하게 된 웹툰이 대상의 영광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작년에는 일러스트 부문 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어 장애인 인식 개선 공모전과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렇게 대상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데 부상으로 해외봉사 활동의 기회까지 주니 너무 큰 감동에 가기 전 부터 벌써 떨려왔다.

2015년 10월 21일 수요일,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스리랑카 콜롬보로 향했다. 처음 나가는 해외가 봉사활동이라는 사실은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어떤 문화와 어떤 사람들이 기다릴까? 평소 인터넷과 TV, 사전조사를 통해 알고 있는 스리랑카를 상상하며 잠에 들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콜롬보 공항을 나와 바쁘게 버스에 몸을 맡겼다.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차갑지 않은 공기, 미지근하고 끈적거리는 느낌이 온몸을 덮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상상했던 스리랑카는 현지에 도착하고 보니 다른 점이 많았다. 그 중 가장 놀랐던 것은 스리랑카의 빈부격차였다. 우리 단원들은 장애인 인식개선 프로그램을 현지의 두 곳 학교에서 진행하였는데, 첫 번째 방문했던 학교가 가난한 학교라면 두 번째 방문했던 학교는 부자학교였다. 이 두 학교를 방문하면서 느낀 빈부격차는 마음 한 켠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먼저 방문했던 학교인 Siri Sariputta Maha Vidyalaya는 저소득층 가정의 학생들을 중등 교육까지 지원해주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저소득층 대상의 학교여서 그런지 시설은 매우 열악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여태껏 봤던 그 어떤 사람의 미소보다 더 밝고 예쁜 미소를 이 학교에서 보았다.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 우리 단원들을 환영하기 위해 모여 앉았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학생들 앞에서 우리는 준비해간 장애인 인식개선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장애인 인식개선 내용의 인형극인 '귀가 큰 코끼리 데니쉬'와 인형을 제작해준 장애예술작가 소개 발표를 하였는데 생각보다 미숙하게 진행되었다. 우리의 프로그램을 끝내고 스리랑카 학생들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노래, 무용, 기타연주 등은 완벽했고, 이 무대를 위해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인 것이 보여서 새삼 나는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Siri학교 학생들은 우리와의 프로그램을 위해 “안녕하세요”를 색종이로 꾸민 커다란 게시판을 만들어놨고, 풍선과 리본 등으로 사방을 꾸며놓았었다. 이렇듯 우리를 반기며 웃어주던 그들의 미소는 지금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 경험은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살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 인사까지 마치고 급하게 Siri 학교를 나오니 아쉬움이 컸다. 아이들과 많이 친해지지 못한 채 떠난 것이 제일 안타까웠다. 아이들과 나눈 악수의 온기는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끝까지 창문으로 인사를 해주던 천사 같던 학생들을 다시 보고 싶다.

두 번째로 간 학교는 Wycherley International School 이었다. Wycherley는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아이들을 위한 국제학교였다. 또 반겨주는 아이들이 있겠지? 기대하며 갔지만 Wycherley학교는 소극적이었다. 경계를 많이 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육을 받은 것인지 Siri학교처럼의 반가운 환영 인사는 없었다. ‘아유보완’하고 인사를 해도, ‘Hi’하고 인사를 해도 손만 살짝 흔들어줄 뿐이었다. Siri학교에서 보여주었던 우리의 프로그램이 부족하다 느껴져 더 열심히 준비하여 Wycherley학교에서는 훨씬 매끄럽고 발전된 프로그램을 보여줄 수 있었다. 프로그램을 한 후 학교견학을 하면서 가장 크게 빈부격차를 느낀 것은 학교건물의 차이였다. Siri 학교의 무너질 듯 위태로웠던 낡은 건물에 비해 Wycherley학교는 흰색의 궁전과도 같은 건물이었다.



이 나라의 상류층 자재들인 이 학생들이 스리랑카를 이끌어갈 인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 학교 아이들은 장애와 편견, 빈부 격차 등에 대해서 배우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곳에서 보여준 장애인 인식개선 프로그램이 이 학교 학생들에게 가슴 깊이 남았으면 하고 바랐다. Wycherley학교에서는 활발하게 인사해주는 학생들은 얼마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있었다.

이렇게 두 학교에서 활동을 끝내자 내가 맡은 일을 나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우리’ 봉사단원들이 모두 다 함께 서로 돕고 해냈다는 것이 벅찬 감동으로 남았다.

장애인 인식개선 프로그램 외에도 기관방문을 하면서 스리랑카를 둘러보았다. 전 세계 청소년을 위한 YMCA을 견학하면서 기관의 낡은 모습보다 기억에 남았던 것은 그 곳의 직원 중 한 명이 장애인이었다는 것이다. 지적장애인인 그 직원은 입구에서 우리 단원들과 한 명 한 명 악수를 하며 우리를 반겼었다. 시설 등이 열악하여 개발도상국은 장애인 고용 등에 무관심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편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 의수족 기관도 방문하였다. 사고 등으로 인해 장애가 생긴 장애인들에게 의수족을 무료로 제공해주는 단체였다. 의사 선생님부터 제작자까지 의수족 기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는데 재활치료까지 가능했다.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과 실제 작업실도 보았다. 하나하나 거의 수작업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의수족을 만드는 일은 힘들어 보였다. 이 곳에서 의족을 제공 받아 생활 중인 분이 우리에게 직접 의족을 착용하고 뛰는 모습 등을 보여주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 어디에도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따뜻한 관심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의수족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장애를 가진 분들이 편안한 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나도 장애인 인식개선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였다.

모든 활동을 끝내고 문화탐방을 하였다. 첫 시작은 세계 8대 불가사의, BBC에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명소로 등재한 시기리야. 한국어를 아주 능숙하게 하시는 가이드 분 덕에 스리랑카 역사 속으로 떠나기도 하고 5세기에 그렸다던 벽화도 보고 눈이 호강한 시간이었다. 카시야파 왕의 유적이라는 시기리야 고대도시에는 풀리지 않을 궁금증으로 가득했고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등산이라면 질색하는 나조차도 자연경관에 넋을 놓고 올라갔으니 시기리야는 8대 불가사의가 맞는 듯하다. 정상에 올라갔을 때의 기분은 지금 생각해봐도 두근거린다. 안 왔으면 후회를 백번은 했을 것 이다. 힘겹게 올라갔던 시기리야에서 내려와 다음으로 방문한 곳도 산이었다. 담불라 황금사원이었는데 가는 길이 계단이었다. "아 또 계단이야. 산이야" 하고 투덜거리니 옆에 계시던 선생님께서 웃으셨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괜히 투정 부렸던 게 지금 생각해보니 죄송스럽다. 사실 시기리야보다 기대를 많이 하고 간 담불라 황금사원은 정말 기대이상이었다. 옛 사원 같은 유적을 좋아하던 나로썬 처음 가보는 불교사원은 가히 충격이었다. 신발이나 모자를 벗고 따가운 돌바닥 사이를 다녀야 했는데 아픔은 잊어버릴 정도로 볼거리가 많았다. 불교 국가라 그런지 석가모니 상이 많았는데 각각 다른 왕들이 만들어서 그런지 양식이나 모양새를 살짝 달랐지만 역시 얼굴은 한결 같았다. 5개의 사원이 있었고 주무시는 석상이 엄청 많았다. 제일 기억 남는 건 처음 입장할 때 시기리야만한 금색의 석가모니상. 내가 사는 지역 근처 속리산에도 커다란 석가모니 상이 있어서 그런지 더 반가웠다.

많은 것을 주었고 더 많은 것을 얻고 돌아가는 길. 처음 온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인도양은 우릴 반겨주었다. 끝으로 인도양 바다를 들렀다. 마지막 인사를 하니 바닷물이 파도를 통해 인사를 받아주었다. 짧게 바다를 바라보다 바닷가 옆 100년 되었다는 오래된 호텔을 관람했다. 영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호텔에는 많은 유명인들이 다녀갔고 아직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이 호텔과 시내의 오래된 건물들은 영국의 오랜 식민지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을 아픈 역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스리랑카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함께 나아가는 우리 축복입니다.' 는 내가 공모전에 제출한 웹툰의 제목이었다. 즉흥으로 급하게 지었던 제목이지만 의미를 많이 부여한 제목이다. 사실 그 축복을 내가 받은 게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스리랑카에서의 경험은 내 인생에 있어 앞으로도 그리고 지금도 영원히 기억에 남아 멘토가 될 경험이다. 나는 성격이 워낙 소심하고 내성적이라 같이 했던 사람들과 많이 친하게 지내진 못했지만 대신 많은 배움을 얻었다. 앞으로도 이런 경험을 스스로 찾아서 해볼 생각이다. 낯설었던 땅 스리랑카, 4박 6일, 짧은 여정동안 인도양의 눈물에서 스리랑카의 미소를 찾아냈다.